내가 졸업한 그날도 8월 27일 금요일이었다.
아직도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유학 전 서류 준비할 때, 프랑스에서 학교 지원할 때, 또 CV를 작성할 때 졸업 날짜를 자주 썼기 때문인 것 같다.
여름, 파란 하늘, 가족들, 친구들, 생생히 기억이 난다.
왜 내 졸업식인데 슬리퍼(뮬)를 신고 왔냐는 구박 아닌 구박까지도.
겨울 졸업식에는 졸업생이 훨씬 더 많아서 각 단과대 건물에서 졸업식을 하는데,
여름에는 그만큼 많지 않아서 백주년 기념관인가 대강당인가에서 했었을 텐데.
올해는 코로나의 여파 때문인지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
11년 전 졸업식과 같은 날짜, 같은 요일에 열린 서울대 온라인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축사 전문과 인터뷰가 실린 기사를 읽었다.
암으로 투병 중이심에도 여전히 날카롭고 여전히 번뜩이는 시선과 가르침이었다.
김형석 명예 교수님과 더불어 너무나도 닮고 싶은 크리스천 지식인이신 두 분...
사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기간이라 하니, 11년이 지난 후 이 사태를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라는 말이 먹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오늘과 같은 졸업식을 치를 줄이야. 오늘과 같은 날을 살게 될 줄이야! 그리고 지금의 내가 이렇게 살고 있었을 줄이야!(나쁜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
축사를 읽은 오늘 나의 등 뒤에는
세상을 바꾸고 싶던 20대의 패기, 인문학에의 열정, 졸업 후 세상에 던져졌던 불안함, 방황하던 나날, 그리고 새로운 시작... 지난 10여 년의 역사가 쌓여 있었다.
이 글을 올리고 싶었는데 어느 카테고리에 올릴까 고민을 하다 RAPHA에 올리는 이유는, 결국 그 10년(아니 더 오래되었지만)의 역사가 이 분야를 공부하고 RAPHA를 만들게 된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0년) 8월 27일 금요일 졸업한 나 역시도 자타(自他)와 공사(公私)의 담을 넘은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를 만들어가는 주역이자 지금 내 손안에 있는 RAPHA가 가는 길이 바로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고 있는 보증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축사 전문
영광스러운 졸업식에 축사를 하려고 나왔지만 제 눈앞에서는 검은 카메라 렌즈만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랑스러운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축하의 꽃다발도 축하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100년 가까운 서울대의 역사 가운데 오늘과 같은 졸업식을 치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좋든 궂든 여러분들은 비대면 강의를 듣고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그룹에 속한 졸업생이 된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디지털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10년 앞당겨서 학습하게 되었고 그리고 살결냄새 나는 오프라인의 아날로그 세상의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강의를 듣는 수업만이 대학이 아니라 잔디밭 교정을 거닐며 사사로이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던 것 역시 대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디지털 공간의 ‘접속’과 아날로그 현실의 ‘접촉’이 상반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로 ‘융합’한 디지로그 (digilog=digital x analog) 시대를 살아갈 주역이 된 것입니다.
또한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서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기침 하나가 내 일상의 생활을 뒤집어 놓은 상황도 겪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어떤 물질적 가치보다도 생명의 내재적 가치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순간 물질 자본이 생명 자본으로 전환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코로나 팬데믹의 학습효과로 누구나 쓰고 다니는 똑같은 마스크 한 장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시각과 생각을 얻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이유를 물으면 “나와 남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간단한 대답 같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서 쓴다”라는 사적/이기적 답변이 아니면 “남들을 위해서 쓴다”의 공적/이타적 답변밖에는 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나[自]에게 득이 되는 것은 남[他]에게는 실[失]이 되고 남에게 득이 되는 것은 나에게는 해가 되는 대립관계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적 배재의 논리가 지배해 왔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우리는 마스크의 본질과 그 기능이 그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면을 모두 통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쓰는 마스크는 곧 남을 위해서 쓰는 마스크”라는 공생관계는 지금까지 생명의 진화를 먹고 먹히는 포식 관계에서 남을 착취하는 기생 관계로 해석해 왔던 편견에서 벗어 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똑같은 마스크를 쓴 얼굴이지만 그것을 쓰고 있는 마음에 따라서 포스트 코로나의 앞날이 결정될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70억의 세계 사람을 향해서 당신은 왜 마스크를 쓰고 있는가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요. “나와 남을 위해서”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서 쓰라고 하니까 쓴다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획일주의 전제주의 밑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이 많은 까닭입니다.
여러분들은 자타(自他)와 공사(公私)의 담을 넘은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를 만들어가는 주역들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손안에 있는 학위 수여증은 바로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고 있는 보증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비대면으로 치루어진 졸업생 여러분들에게 보내는 저의 축하 메시지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130153
P.S 아마 싸이월드에 졸업식 사진이 있을 텐데, 요새 부활했다 하니 한 번 들어가 볼까?! (아직 아니었다..)
P.S 2 졸업식 사진 없으면 섭섭하니 프랑스 졸업식 사진이라도
'RAPHA' 카테고리의 다른 글
RAPHA 에서는 무슨 일을 할까? (0) | 2020.08.29 |
---|---|
What is 'RAPHA'? (0) | 2020.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