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작성했던 노트르담 단상1~4를 한 글로 재구성해보았습니다.
#1. 화재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노트르담 성당 화재에 대한 나의 기억은 RER에서 시작한다. 파리 근교 Parc des Sceaux 역에서부터.
벚꽃이 절정이었던 2019년 4월 15일, 파리에서 벚꽃이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Parc des Sceaux를 찾았다. 지하철을 타고 RER B선으로 갈아타고 또 공원까지 걸어가야 하는 귀찮음이 있지만 언제 또 벚꽃이 떨어질지 몰라 그 귀찮음을 이겨내고서라도 갈 만한 가치가 있는 정말 아름답고 멋진 곳이다. 파리와 파리 근교를 통틀어 최고의 벚꽃 명소! 어쩌면 여기가 천국 맛보기일지도 모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봄날 오후였다. 하지만 그 평화도 잠시,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불이 났다는 속보가 뜨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곳에서 비현실적인 소식을 들은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소식이라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멍 때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이 났다는 사실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화재가 났다는 말인즉슨 당장 파리로 달려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취재하러.
남편이 먼저 파리로 달려갔고 나는 RER을 타러 갔다. 다시 비현실적이게도 넓은 역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시간을 못 맞추면 RER은 10분 이상 기다려야 할 수도 있는데 RER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천년만년 같았다. 샤를리 엡도 테러가 났을 때도 테러 속보를 듣고 벌벌 떨며 RER을 타고 집에 갔는데, 그때와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그래서 노트르담 성당 화재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날 Parc des Sceaux에서 찍은 사진. 한국 시간으로 세팅되어 있어서 16일 새벽 1시~2시로 저장되어 있는데, 프랑스 시간으로 하면 4월 15일 저녁 6시~7시쯤 되었을 것이다. 화재가 오후 6시 50분경 발생했다고 하니 아마 사진 찍고 놀고 있을 때 화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2. 역사
노트르담 화재로 지붕과 첨탑이 소실되었다. 첨탑이 무너지는 순간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노트르담이 파괴된 건 이번 처음이 아니었다. 성당 고난 역사의 중심에는 프랑스혁명이 있다. 석사 논문 주제가 건축 문화재 파괴의 역사였는데, 논문 한 파트 안에서 노트르담 성당 파괴 역사를 다루었다. 노트르담 정면(서쪽 파사드)에 있는 왕들의 갤러리(La galerie des Rois)에 있는 조각상들이 프랑스 왕을 상징한다고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프랑스혁명 당시 이 조각상의 목이 잘려나갔다는 내용이다. 원래 왕들의 갤러리의 조각상은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계를 표현한 28개의 조각상이다.
그러면 노트르담은 왜 파괴되어야 했을까?
종교를 박해했던 프랑스혁명 동안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파리 노트르담 성당 외에도 수많은 종교 시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파리 노르트담이 상징적 의미가 된 이유는, 그녀가 혁명 기간 동안 사회, 정치, 종교 운동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고고학적 오류(논문의 참고문헌에 있던 표현을 그대로 따온 것인데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는 촉매제 역할을 했을 뿐, 성당은 이미 처형될 운명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파리 코뮌은 브뤼메르 2년(1793년 10월 23일)에 왕들의 갤러리를 파괴하기로 결정했고 철거를 진행했다.
의회는 종교적 편견을 부추기고 왕정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기념물을
모두 없애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며
앞으로 8일 안에 노트르담 정문을 파괴할 것을 결정했다.
군주제를 향한 민중의 분노는 교회에 대한 분노와 결합되어 민중들은 왕들의 갤러리에 있는 동상을 꺼내 목에 끈을 묶어 참수형을 집행했다. 상징과 의미를 지닌 기념물과 적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이 조각상뿐만 아니라 성당 곳곳이 훼손되었다. 1792년부터 지붕의 첨탑과 종탑이 파괴되었는데 파리 시내에서 홀로 높이 솟아 다른 지붕을 내려다보며 지배하는 첨탑과 종탑이 프랑스혁명의 3대 이념 중 하나인 평등에 반하는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작가이자 노트르담 복원의 계기를 마련한, 노트르담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과 프랑스혁명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트르담에 영향을 준 것은) 피할 수 없는 시간의 결과인 주름과 비트루비우스와 비뇰라 이후 선생들이 행한 그리스, 로마, 이방인식 작업의 결과인 훼손과 복원, 마지막으로 혁명이다.'
위고의 말을 다시 해석해보자.
대성당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시간, 고딕 양식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으로 일어난 복원과 훼손이 노트르담 성당의 흔적을 설명해주지만, 그 무엇보다도 프랑스혁명이 노트르담 성당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3. 복원
노트르담 화재가 일어난 후, 마크롱 대통령은 노트르담 복원을 5년 안에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아마도 파리 올림픽 때문?) 하지만 집 앞 건물 하나 철거하는 데도 몇 달이 걸리는 프랑스에서 문화재 복원을 5년 내에 끝낸다는 약속을, 아마 마크롱 대통령도 속으로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느린 프랑스인데다 복원을 방해하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등장했는데, 그건 바로 성당이 녹아내리면서 발생한 납. (그리고 코로나 19) 성당 골조에 사용되었던 납이 전부 녹아내려 그 일대는 물론 수백 미터 떨어진 곳까지 공기 중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환경보호단체 로뱅 데 부아(로빈 후드)의 협회장이자 대변인인 자키 본맹(Jacky Bonnemains)과 인터뷰를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협회나 단체를 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인지 정말 별의별 협회 및 단체들이 정말 많다. 시민, 환경단체라는 특성, 환경 운동가이자 대변인, 거기에 말하기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기질까지 더해져(추가로 더위와 긴장... etc) 이분과의 인터뷰 통역은 유난히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있다. 속된 말로 기가 다 빨림.
아직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여름의 파리는 여전히 관광객으로 바글바글했고, 관광객들은 노트르담 주변에 납 오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로 방문하고 있어 납에 중독될 위험이 있으며 이들의 옷이나 신발을 통해 더 많은 곳으로 확산될 수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공사가 중단되었고 추가 붕괴 위험, 그리고 코로나 19까지 겹쳐 한동안 노트르담 복원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현재 2021년 하반기에는 화재 다음날부터 시작된 보강 작업이 완료되어 올 겨울부터 복원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공모를 통해 복원 공사를 담당할 업체를 선정하게 된다. 마크롱 대통령이 약속한 5년 안에 공사가 완성되지는 못하겠지만 성당 재건 공사 총담당자인 조르주랑 장군이 2020년 12월에 발표한 대로 본당에서 다시 미사를 거행해야 하는 날인 2024년 4월 16일까지 예배를 거행할 수준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4. 미래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노트르담은 어떻게 복원될 것인가?
얼마 전에야 화재 직전의 모습인 비올레 르 뒥의 모델을 따라 복원하기로 결정하였지만 화재가 일어난 후 2년이란 시간 동안 아마 노트르담 관련 최고의 논쟁거리는 바로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라는 문제였을 것이다. 주된 쟁점은 다음과 같다.
현대식으로 아예 새롭게 지어야 한다 ex) 꼭대기에 정원을 짓거나, 수영장을 만들거나, 온실을 만들거나 등 vs
원형 그대로, 우리가 원래 알던 첨탑 모습 그대로 복원해야 한다
노트르담 복원에 있어서 원형 그대로 복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고, 또 결국 그대로 복원하기로 결정되었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실 우리가 알던 노트르담 지붕의 모습은 원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2. 역사에서 밝힌 것처럼, 프랑스혁명 당시 노트르담은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고 이미 그전에도 오리지널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노트르담 복원 공사의 책임자였던 비올레 르 뒥은 프랑스의 복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데, 그는 원형을 복원하기보다는 인문학적 지식 등을 바탕으로 복원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후세에 증축된 부분을 없애고 원형으로 기념물을 되돌리자는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각 시대마다 각 시대의 양식을 담아 추가된 부분은
그 양식 그대로 원칙적으로 보존되고 보강되고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비올레 르 뒥은 19세기에 노트르담을 새롭게 복원하였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노트르담의 모습이다. 심지어 또 다른 복원 책임자였던 라쉬는 첨탑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첨탑 건설을 반대했다. 교차부 상부에 1792년에 파괴된 첨탑의 흔적을 본 비올레 르 뒥이 새로운 첨탑을 디자인했고 그것은 라쉬가 죽은 후에 세워졌다.
문화재 복원에서 원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문화재 복원의 기본 원칙이 바로 원형 복원이기 때문이다. 원형의 문제는 문화재 복원에서 중요한 개념인 진정성(authencité)과도 관계가 있다. 하지만 모든 문화재가 다 원형으로 복원할 수 없으니 어느 시점으로 복원할 것인가, 무엇을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점을 합의하고 후대를 위해 기록해 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에 따라 비올레 르 뒥이 재창조한 노트르담은 원형의 모습이 아니고, 엄밀히 말해 진정성의 입장에서는 원형을 살리지 못하는 복원이라고 할 수 있지만, 19세기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으니 이제는 잘 복원되길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복원 방향이 결정이 났지만 2020년 초반은 여전히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팽팽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어떤 한 단체는 노트르담 원형(즉, 19세기 비올레 르 뒥의 모델)에 따른 복원을 촉구하기 위해 행사를 진행했다. 그 단체는 Association ouvrière des Compagnons du devoir et du Tour de France라는 매우 긴 이름을 가진 단체로, 옛날의 전통적인 의무적 수습기간에 따라 여러 가지 직업 훈련, 교육 및 실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이다. (정말 별의별 단체가 존재하는 프랑스) 여러 가지 직업 중 목수가 포함되어 있고, 이 목수 과정을 배우는 학생들이 화재로 불탄 노트르담 목조 골조 모형을 만들어 그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Pantin에 전시를 하였다. 노트르담 복원에 대한 여러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취재였다.
노트르담 복원에는 경력이 10년 이상이 되는 목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목조 골조 모형을 만든 학생들은 당장 복원 공사에 투입될 수 없다. 하지만 이 목조 골조대로 복원하기로 결정이 난 만큼,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기나 긴 복원 작업 동안 이 학생들은 분명 훌륭한 미래 자원으로 성장할 것이고 또 언젠가는 현장에서 학생들을 필요로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현장에서 들어 본 학생들의 목소리에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신감과 꿈이 넘쳐났다.
일단 노트르담의 원형이 무엇인지 차치하고서라도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충분한 논의를 거쳐 복원의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점과 그 복원 과정 동안 미래의 복원 꿈나무들을 교육시키는 체계. 그리고 시간을 좀 더 거꾸로 돌려 수많은 문화재를 파괴했지만 그 파괴로부터 역설적으로 문화재 보존 개념이 논의되기 시작하고 문화재 보존을 국가의 책무로 인식하게 된, 문화재 보존정책 역사에서의 전환점이 된 프랑스혁명. 노트르담 화재라는 한 사건에서 오랜 시간 동안 문화재를 보존하고 사랑하고 문화재에는 정말로 진심인 문화강국 프랑스의 힘을 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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