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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야기 Histoire de la France

무명한 자 같으나 우리는 모두 내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 리뷰

RAPHA Archives 2023. 3. 5. 20:42

우리는 왜 독서를 할까? 독서의 중요성은 무엇일까? 클릭 한 번이면 다 되는 이 세상에서 왜 굳이 시간을 들여 활자로 인쇄된 책을 읽으라고 하는 걸까? 독서의 장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공감 능력 향상을 들고 싶다. 우리는 독서를 하면서, 특히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고 등장인물의 상황에 공감한다. 이렇게 독서를 통해 길러진 공감 능력은 점점 더 타인에게 관심 없어지는 삭막하고 이기적인 세상 속에 이웃과 사회를 향한 따뜻한 공감 한 스푼을 첨가한다. 얼마 전 읽은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는 동네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는 아이 키우는 엄마이자, 오랜 시간 연기를 해왔어도 여전히 대중에게 낯선 어느 무명배우의 이야기다. 이 글의 주인공은 내가 프랑스에서 처음 만난 '배우엄마' 이헌주이다(친애하는 언니이지만 존칭은 생략하기로).
 
 
 


 
 
육퇴 뒤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히 써내려 온 글을 출판사에 투고하고 계약을 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지 몇 개월 후, 드디어 책이 출간되었다. 페르메이르(베르메르가 아닌)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연상시키는 표지 속 실루엣이 가장 먼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실루엣만 봐도 언니인지 알 것 같아, 헌주 언니를 같이 아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올해 한국나이로는 불혹이 된, 하지만 만 나이 폐지로 30대 유예기간을 선물 받은 84년생 배우 이헌주이다. 그녀는 셰익스피어를 만나 사랑에 빠진 열여섯에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열여섯은 일본문화 수입금지 시절 MTV에서 L'Arc~en~Ciel 뮤직비디오를 보고 하이도(Hyde)에게 빠진 나의 열다섯이었다. 25세 이하 금발 여자만 사귀는 뚱땡이 40대 아저씨(이제 50?ㅜㅜ)가 아닌 <로미오와 줄리엣>의 치명적인 미소년으로 여전히 디카프리오를 기억하는 밀레니엄 세대.  <꽃보다 남자>가 아닌 해적판 <오렌지 보이> 속 츠카사를 좋아하던 나의 동년배(나는 츠카사보다 루이~❤) 배우엄마 이헌주. 
 
아무리 지인이라지만 나는 엄마도 배우도 아닌데 (책 소개가 밝히고 있듯)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배우인 '배우엄마'의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약 8년의 시간이 사라진 뒤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나는 띠동갑보다 어린 동기와 함께 입사를 했다. 내가 투입된 프로젝트의 관리자는 10년의 경력이 있는 나와 동갑인 상사(심지어 빠른이라 나보다 1년이 어린). 동기들과도 공감할 수 없고, 또래지만 훨씬 직급이 높은 상사와도 공감할 수 없는 그런 웃픈 현실과 10년 만에 맞이한 K-직장생활에서 맥을 못 추던 나에게 동년배의 이야기라는 이유만으로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렇다고 동년배 프리미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저자와의 가장 큰 공감대는 우리가 처음 만난 바로 그 장소, 프랑스였다. 작가는 배우라면 한 번쯤은 꿈꿔봤을 아비뇽 연극제에 연극여행을 떠났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금 그 삶의 축제에 뛰어들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프랑스에서는 '에라스뮈스 문두스'라는 안정적인 장학생도 포기하고 가슴 뛰는 무대를 향해 파리의 연기실기학교에 입학했다. 그야말로 사서 고생을 선택한 것이다. 그 후 이어지는 생활고, 인종차별, 문화와 언어적 차이, 외로움... 파리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마주한 그 모든 것들을 겪은 그녀. 하지만 바로 그 광야생활이 진짜 배우로서의 삶의 시작이었고 그때의 고난은 배우로서의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한국에 돌아와 서른한 살에 연극 무대에 데뷔한 그녀는 두려움과 초조함,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며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때의 눈물 나는 고백이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인 것 같은 나에게, 어디서도 발 붙일 수 없고 적응하지 못하는 건 다 모난 내 성격 탓이라고 자책했던 나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속삭여주었다. 전공이나 분야는 달라도 두 문화 사이에 끼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담담히 풀어낸 그녀의 이야기가 지친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프랑스에서 나의 강점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모국어를 사용하는 연습실에서 적용되지 않아 당황했다. 파리 거리에서 줄기차게 연습했던 '마이즈너 연기법(반응 훈련)', 무대 위에서 존재하는 것 등은 오히려 말이 자유로워지자 어려웠다. 불어로 연기할 때는 언어의 한계가 있었다. 연습실과 무대에 서는 모든 순간 나의 촉과 더듬이를 바짝 세워야 했다. 특히 동료들이 연습할 때마다 동선과 대사를 다르게 준비해 와서 진짜로 듣지 않으면 행동할 수 없었던 상황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노력 없이도 대사가 잘 들렸다. 상대에 집중하지 않아도 반응할 수 있었다. 익숙하고 능숙한 모국어 사용이 되려 진짜로 듣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한국말을 오히려 못 듣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나의 촉과 더듬이가 둔해졌다. 아! 산란은커녕 도태인가?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 107쪽

 

진주 귀고리의 소녀를 떠올리게 한 배우엄마 이헌주의 첫 에세이, &lt;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gt;

 
 

 

 
 
독서의 장점에는 공감 능력 향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폭넓은 경험의 대리체험. 그리고 그것을 통한 사고의 확장, 이것이 독서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에서 나는 나와는 전혀 다른 (같은 유학생이라고 하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치열하고 파란만장한 유학생활을 보낸 20대 이헌주를 만났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녀는 유학생으로 안 해 본 알바가 없었다. 학교 생활은 또 얼마나 처절한지. 가만히 수업을 듣기만 해도 되는 대학 강의실에 혼자 동양인으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그녀는 유일한 동양 여자로, 낯선 외국어로, 몇 년은 어린 콧대 높은 파리지앙 아티스트 틈바구니에 끼어 연기를 해야 했다. 가만히 수업을 듣기만 해도 밀려드는 문화, 언어적 차이를 감당하기 힘든데 백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한정된 캐스팅 속에서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파리 생활기를 읽는 내내 친구이자 인간으로서, 같은 유학생으로서 존경심이 절로 흘러나왔다. 파리에서 고군분투하는 20대 이헌주를 만나면 수고했다고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을 정도로. 그러면서 나의 파리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얼마나 게으르고 악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었던가! 나는 영원히 파리에서 살 줄 알았다. 집 밖을 나오면 에펠탑이 눈앞에 서 있는 게 당연했다. 집 값이 비싸서 눈앞에 에펠탑이 보이는 동네에서 계속 살 수는 없을지라도 이사를 가도 외곽으로나 갈 줄 알았지 이렇게 한국으로 이주당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래서 한심하게 살았다. 그 아름답던 시간을 감사하지도,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다. 20대의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은 지금의 나는 게으르고 형편없는 30대 초반의 나를 만나면 아마 등짝이라도 한 대 치면서 이렇게 말하겠지. '집에서 그만 퍼질러 있고 빨리 밖으로 나가! 뭐라도 해! 파리는 널 영원히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돌아보면 각자에게 가장 맞는 이별이었을 것이다. 30대의 새로운 무대를 한국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한 그녀는 6년을 울고 웃었던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국행을 결정하고 나니 프랑스의 낭만이 그녀에게 물밀 듯 흘러들어왔다. 파리의 낭만이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단호한 그녀의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내면에 가득 찬 말들을 풀어내려면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산란하는 연어처럼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미련이 철철 남아 내 힘으로 절대 한 걸음도 못 뗐을 나에게는 파도에 몸이 떠밀려가듯 강제 이주가 파리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장 적절한 이별이었을 것이다. 
 

20대의 마지막을 파리에서 지내는 행운을 누렸다. 30대의 새로운 무대는 한국이다! '회귀하는 연어, 바다에서 성장했으니 이제 내 안의 것들을 쏟아내려 태어난 곳으로 가자!' 이미 프랑스에서 적응한 탓에 한국에 가면 또다시 이방인 기분을 느끼게 될 듯했다. 한국행을 결정하고 나니 프랑스의 낭만이 물밀 듯 내게 흘러들어왔다. 유학 막바지에 나는 에펠 탑 근처로 이사했다. 집으로 가던 눈길 쌓인 고즈넉한 골목길을 걸으며, 내 삶의 한때를 누렸다. 시간 맞추어 점멸하는 에펠을 보며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 어느 겨울의 차가운 쇼윈도도, 늘 걷던 샹젤리제 거리와 콩코르드 근처의 카페도 모두 따스함과 그리움이 덧입혀졌다. 귀국을 결정했으나 익숙한 생활과 파리의 낭만이 나를 붙잡았다.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 107쪽

 
 

 

 
 
 
사실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를 읽으면서 가장 놀라기도 하고 부러웠던 점은, 나와는 대비되는 파리에서의 삶도 아니고, 나에게는 없는 열정이나 결연함도 아니었다. 어쩌면 은밀할 수도 있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다운 필체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언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문학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의 글이 좋다고. 사실 그렇다.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은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보고 분석하여 -분석이라 쓰지만 따져대는- 내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물론 주로 내가 겪은 일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는 개인의 속내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신앙 고백 시리즈도 쓰다가 멈췄는데(사실 시간이 없어서 못 썼다는 핑계를)... 어쨌든 간증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완전히 변해버린 가치관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커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나는 시 필사로 다져진 순수하고 따스한 그녀의 필치가 정말 좋았다.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그것은 엄마가 된 후 180도 달라진 새로운 가치관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개개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배우의 직업병일 수도 있다. 혹은 신앙을 점점 더 드러내기 힘든 이 시대에 당당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외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되었든 배우엄마 이헌주는 진심을 건네고 싶은 배우임에 틀림없다. 치유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영혼의 손수건, 혹은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되고 싶은 배우. 인문학과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나는, 어떻게 이런 분야를 알게 되었는지 감탄해마지 않았던 문화재 보존 전공자인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의 전공을 버렸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전혀 없는 주제에 인문학과 예술을 한다고 떠들어대는 내가 너무 역겨웠기 때문이다. 인간을 살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문화재를 살리겠다고 하는 게 어불성설 같아서였다. 나는 이렇게 예술을 떠났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배우엄마 이헌주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연기자, 예술로 세상을 (치유 대신) 응원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훈훈한 배우로 남길 간절히 바란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한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공연을 하고 싶었다. 허공을 방황하는 그 눈빛이 공연장에 돌아오기를 바랐다. 물론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까지 그분의 눈은 공연장 어딘가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내가 극의 내용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어도 내가 연기하는 말 한마디에 진실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공연장에서 방황하던 눈빛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잠깐의 위로가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지인의 말이 내게도 힘이 되었다. [...] 모든 사람에게 위로를 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극장을 나서며 마음이 풍성해졌다고 말하면 그것도 괜찮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의 진심을 담아내자' 진부해도 진심이 힘이 될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 134-135쪽

 

 

 
 

 
연극과 사랑에 빠졌던 열여섯, 아비뇽과 파리에서의 불타는 20대를 보낸 후, 서른하나의 막내를 지나 이제는 배우엄마까지. 어떤 자리에서든 최선을 다하며 주어진 길 위에서 자신만의 꽃을 피워내는 배우엄마 이헌주는 세상의 모든 무명이를 응원하며 마무리한다. 무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빛나는 그녀에게 나 또한 따스한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장 9절-10절

 
 
p.s. 배우엄마의 도전 덕분에 나도 약간의 속이야기를 털어놓을 용기가 생겼다. <무명이라고 아마추어는 아닙니다>를 검색하자 (사실 키워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익숙한 분의 얼굴이 나와 홈페이지를 클릭했다. 거기에는 앳된 얼굴의 아빠가 나온 사진이 있었다. 나는 태어났지만 동생은 아직 없었던,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아빠. 나에게 영원히 기억될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