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여성 최초로 팡테옹에 안장된 조제핀 베이커 이야기
파리 13구에는 어느 한 수영장이 있다. 구마다 하나 이상의 수영장이 있는 생활체육의 도시 파리에서 하나의 수영장을 굳이 콕 집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이곳은 정말 특별하다. 왜냐하면 센 강에 위치한(센 강변이 아닌 '센 강'에 위치한), 아니 센 강에 떠있는 수영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야경이 환상적인데 밤에 이곳에서 수영을 하면 바또 무슈를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센 강에서 수영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3개월짜리 시립 수영장 패스를 끊으면 파리 시내의 시립 수영장 어디서든 수영할 수 있는데 이 수영장은 너무나도 인기가 좋은 나머지 특별 대우라 요금을 따로 지불해야 한다. 단연코 내가 뽑은 파리 최고의 수영장. 그리고 이곳의 이름은 바로 '조제핀 베이커'
미국 태생의 조제핀 베이커(Joséphine Baker)는 벨 에포크를 떠올리게 하는 포스터, 사진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가수이자 댄서, 배우, 요즘 시대로 따지면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사실 수영장에 다닐 때만 해도 이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대전 때는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한 인권운동가였다. 2013년 작가, 철학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던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의 제안으로부터 시작하여 약 40,000명이 그녀가 팡테옹에 입성하도록 요청하는 청원에 서명하였고, 대통령의 최종 결정을 거쳐 안장이 확정되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조제핀이 파리에 온 이유는 단순하다.(내용은 단순하지 않지만)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 때문이었다. 미국에 사는 흑인 중 대다수가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게 아니라, 더 이상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떠났던 시대였다. 미국에서 숨이 막혔지만, 파리에서는 해방감을 느꼈다. 프랑스에 도착한 그녀는 여전히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는 나를 하나의 사람으로 여기지 색깔로 생각하지 않는다" 1963년 워싱턴에서 마틴 루터 킹의 행진에 함께 한 그녀는 자신의 프랑스 군복을 입고 외쳤다.
프랑스에서 저는 결코 두려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환대해준 프랑스를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다하겠다고 결심한다. 프랑스를 매혹시킨 그녀는 이제 조국(프랑스인과 결혼하여 프랑스 국적을 취득)을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세계 대전에 참전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1940년 해방될 때까지 자유 프랑스, 북아프리카 등의 비밀 요원에 참여했다. 이후에는 미국 인권,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전쟁이 끝난 후 1947년에는 1937년부터 임대하여 19969년까지 살았던 도르도뉴의 밀랑드 성을 구입했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세계 각국에서 입양한 12명의 아이를 이 성에서 키웠다. 그녀는 이 아이들을 '무지개 부족'이라고 불렀다.
마크롱 대통령의 보도 자료에서 진정한 '프랑스 정신의 화신'이라고 칭송받은 그녀의 아름다움, 매력, 재능, 그리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용기는 또 다른 방식으로 프랑스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그녀를 향한 사랑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과학자인 소피 베르텔로(Sophie Berthelot), 물리학자이자 노벨 물리학상 및 화학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Marie Curie), 레지스탕스였던 제르멘 틸리옹(Germaine Tillion)과 드골의 사촌이자 레지스탕스였던 주네비에브 드골-안토니오즈(Geneviève de Gaulle-Anthonioz), 가장 최근에 안장된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Veil)에 이어 팡테옹에 입성한 여섯 번째 여성이자 최초의 흑인 여성이 되었다. 유해는 유족에 뜻에 따라 여전히 그녀가 잠들어 있는 모나코에 있지만, 세노타프(유해가 없는 묘, 묘비)가 유해를 대신해 팡테옹에서 베이커를 기념할 것이다.
오랜만에 메인에서 확인한 프랑스 소식은 오래간만에 들뜨게 만들었다. 내가 사랑했던 프랑스는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를 (겉으로라도) 지키려 애를 쓰는 나라였다. 물론 인종차별을 당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프랑스 사회 전부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재능이 있는) 누구나 프랑스에 와서 꿈을 펼칠 수 있다. (굳이 여러 다른 예를 나열하지 않아도) 여기에 나온 조제핀 베이커가 그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를 누릴 권리에는 뒤따르는 것이 있다. 자신을 색깔이 아닌 사람으로 받아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 그리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는 것(자유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기에).
20세기 초 '검은 비너스'에서 20세기 중반의 레지스탕스와 인권 운동가를 거쳐 21세기 초부터 센 강의 밤을 아름답게 수놓은 그녀의 이름은 이제 팡테옹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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