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도 어느새 3분의 2가 지나갔고 2022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12월 말까지 마감이라 바빠서 정말로 글을 쓸 시간이 없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쓰려고 계획해 놓은 것들은 많았는데 마지막 글을 쓰고 20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단어 그대로 내 삶의 bouleversement(대혼란, 급변, 전복... 등). 여기에 모든 것을 다 쓸 수 없겠지만 쓸 수 있는 한 최대한 써보려고 한다. 힘을 빼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허무주의와 비관론적 결론밖에 쓸 수 없을 테니.
벌써 몇 달 전이 되었는데, 오랜만에 프랑스 친구를 만났다. 이제는 위치가 바뀌었지만 외국인으로서 타지에 사는 고달픔에서부터, 내가 왜 프랑스에 가고 싶었는지 지금은 프랑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쨌는지 저쨌는지 등등 간만에 묵혀두었던 프랑스어에 기름칠을 하며 이런저런 주제를 나누었다. 프랑스어를 안 쓴 지 좀 되었지만 텍스트를 꾸준히 읽어서 그런가 오히려 프랑스에 있을 때보다 말을 더 잘 한 것 같기도 했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 속마음도 털어놓고.. 마치 파리에 있는 꿈을 꾼 것 같은 시간이었다.
다른 글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오래전부터 프랑스를 좋아했고 프랑스에서 살고 싶었던 (사대주의 수준의) 프랑스 찬양론자였다. 내가 이렇게 프랑스를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콩깍지가 벗겨지고 깨달았는데) 유학 가서 작년까지의, 길다면 긴 장기 체류를 제외하고 항상 프랑스에서 단기 체류만 했었기 때문이었다. 무비자 여행, 연수, 단기 교환학생... 은 그저 프랑스의 화려한 겉모습만 담고 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돌아가기 아쉬운 마음에 항상 귀국하는 공항에서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장기 체류는 달랐다. 악명 높은 프랑스 행정을 필두로 언어적 한계, 나라 자체에서 뿜어대는.. 완전 우울함도 아닌 또 완전 게으름도 아닌 그 사이에서 사람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이 모든 것들은 단기 체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럼에도 나는 내 선택에 불만이 없었다. 냉정한 말이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됐고,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돌아갈 만큼 힘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이런 나의 콩깍지가 벗겨진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코로나였다. 중국에서 코로나가 시작되고 한국, 아시아까지 번지기 시작할 때,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이 되면서도 설마 유럽까지 번지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었다. 지금이 배 타고 다니던 시대도 아니고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별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는 당연히 유럽에 도착을 했고 걷잡을 수 없이 퍼졌으며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당한 프랑스는 첫 봉쇄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봉쇄령의 파리는 진짜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나 그 정적도 잠시, 답답함을 못 참고 프랑스 사람들은 한 두 명씩 밖을 나오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아지기 시작하니 센 강에서 운동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났고 봄이 시작되면 언제나 그랬듯 곳곳에서 햇빛을 받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또 달라졌지만) 그때는 이런 프랑스 사람들이 너무나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나의 눈에는 '본인은 안 걸릴 거야'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유럽까지 번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나처럼) 본인 생각만 하며 날씨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몇 주만 참으면 되는데 왜 그것을 못 참아서 굳이 밖에 나가려고 할까? 참는 사람은 바보가 아닌데. 사실 어릴 때부터 유럽에서 살고 싶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이 개인주의 때문이었다. 정해진 나이에 정해진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는 한국에 비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유럽의 자유가 좋았다. 그러나 팬데믹 와중에도 자신의 감정과 행복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구보다 나밖에 모르고 살았던 내가 그동안 이렇게 한심스럽게 살아왔겠구나.라는 자기반성을 하며 프랑스를 마음에서 떠나보냈다.
이런 프랑스 이기주의의 끝판왕은 단연코 '파업'이라고 할 수 있다(파업의 장점을 차치하고). 한국에는 백신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젊은 층은 못 맞고 있었던 올 여름쯤, 프랑스에서는 백신을 반대하는 시위가 자주 일어났다. 시위에는 20만 명이 넘게 모였는데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프랑스 있었을 때는 손만 잘 씻으면 된다고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나는(어차피 마스크가 없었지만;;) 어느 순간 마스크 없이는 어색한 사람이 되어버렸고, 어느새 그들을 향해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사람이 많이 모였는데 마스크는 좀 쓰지...'라는 비난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한국의 접종률이 10%를 웃돌 때고 그래서 부작용에 대한 기사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왜 백신이 있는데도 안 맞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Pass Sanitaire 보건 패스, impasse는 곤경, 궁지, 사면초가라는 뜻으로 보건 패스를 반대하는 동시에 보건 패스를 실시하며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는 상황 역시 반대한다는 언어유희를 하고 있다. 밑에 빨간 줄은 '우리의 권리, 안전, 병원 그리고 자유를 수호하자!'라는 뜻이다.
'차별 반대, 격리 반대, 백신 의무화 반대'라는 뜻
'우리의 간병인과 아이들을 건드리지 마! 백신 의무화는 안 된다!'라는 뜻
프랑스의 égoïsme 때문에 프랑스를 좋아했던 내가 프랑스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을 친구에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파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프랑스 이기주의를 논할 때 파업은 빠질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이런 표현을 썼다. 파업을 하는 이유가 혹시 'contre pour contre',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냐고. 친구는 적극 동의하며 프랑스에서는 어릴 때부터 각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법을 배운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게 정말 어렵다고 했다. 일례로 프랑스에서 영화과에 다녔던 남편이 시나리오 발표 수업에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마치 드라마에서 상사가 부하직원한테 '이것도 일이라고 해왔어?!' 라고 하면서 면전에서 종이를 집어던지는 것처럼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라떼 한국 시나리오 수업에서는 다른 학생들 앞에서 욕먹기, 시나리오 찢기기가 기본 패시브였는데 프랑스에서 수업을 들어보니 교수가 학생들의 시나리오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또 학생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던지는 그런 방식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 모습은 비단 시나리오 수업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거의 매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은 내가 보기에 왜 저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질문들을 하고, 교수들은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여담이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해 힘든 문화 중 하나인데, 어쨌든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반박하긴 하지만 그만큼 각각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그동안 프랑스의 이기주의에 나를 비추어 통렬한 자기반성을 했다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기적이었다. 자유의 억압이라 여겼던 것들이 어느새 익숙해지자 불편함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생존의 갈림길에서 고통받고 있었는데 나는 편했기 때문에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아니 알았는데 방관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다 이제야 내 손발이 묶이기 시작하니까 이제야 불편해지고 그래서 괴롭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는 익숙함에 속아 불편함을 잊지 않기로 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 빼앗길지 모를 자유를 위해 더 이상 방관자처럼 굴지 않기로 했다. 코로나가 가르쳐주고 또 바꿔놓은 풍경이 너무나 많지만 완벽하게 옳고 그른 건 현실에 없단 것, 그리고 더 이상 나의 일을 남에게 미루지 말자는 것, 이것이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수확이다.
그렇기에 어느 것이 옳다고 정답을 내릴 수는 없다. 민주주의란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하고 또 모든 의견을 다 다 수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와중에 희생되는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점이 바로 민주주의의 단점이기도 하다. 또 너무 극단적으로 빠지면 전체주의가 될 위험이 있고. 그래서 한국과 프랑스가 적절히 잘 섞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이상일뿐이다. 그럼에도 지금 다시 프랑스의 이기주의가 그리워진다. 공동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오로지 개인의 행복과 자유만 생각하는 그런 이기주의가 아니라,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 ochlocracy를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지 않을 자유 말이다.
마지막으로 왠지 모르게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민중을 이끄는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이 떠올랐다. 알고 보면 살벌한 내용인데 중심에 부각된 여신과 삼색기 때문에 프랑스를 그리워하며 자주 사용했고 또 좋아했던 그림 중 하나였다.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들라크루아는 고전주의와 당대 아카데미 예술의 규범을 거부한 인물이었다. 이 그림은 1830년 7월 27일, 28일, 29일 샤를 10세(Charels X)에 대항한 파리 시민들의 민중봉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보다 며칠 전인 7월 25일 샤를 10세는 자유주의 야당을 진압할 목적으로 4개의 조례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정기 간행물의 자유 중단, 데파르트망 하원의 해산, 귀족에게 유리한 투표권 개혁, 9월 1달 동안 선거인단 소집 등의 조치가 포함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중산층과 민중이 반란을 일으켰고 파리는 삼색기와 바리케이드로 덮였다. 3일간의 소요 끝에 샤를 10세는 왕위를 내려놓았고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가 '7월 군주국'을 시작했다.
들라크루아는 주된 후원자 중 하나인 권력에 반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830년 7월 혁명을 그저 산책하듯 지나쳤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1830년 10월 18일 형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현대적인 주제인 바리케이드를 그리기 시작했어. 조국을 위해 싸워 이기지 못했지만 적어도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는 있으니까." 거리를 뒤덮은 폭력을 보고 잊혔던 애국심을 재발견한 들라크루아는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을 붙였고, 그 덕분에 자유를 되찾으려는 프랑스 시민들의 용기는 들라크루아의 화폭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Quand Delacroix eut vu flotter sur Notre-Dame le drapeau aux trois couleurs, quand il reconnut, lui, le fanatique de l'Empire... l'étendard de I'Empire, il n'y tint plus : l'enthousiasme prit la place de la peur, et il glorifia ce peuple qui, d'abord, l'avait effrayé.
들라크루아가 노트르담 성당 위로 펄럭이는 삼색기를 보았을 때, 제국의 광신도인... 제국의 깃발을 알아보았을 때,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두려움 대신 열정이 자리 잡았고 전에는 그를 두렵게 만들었던 이 민중을 예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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