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소설의 대부분의 소재는 살인사건이다. 의문의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 소설의 특성상, 살인이 가장 흔한 소재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꼭 살인이 필수는 아니다. 아르센 뤼팡이나 명탐정 코난의 괴도 키드 시리즈처럼 도둑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그 소재는 무궁무진하며 살인이 없어도 추리 소설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다. 바로 추리를 기반으로 하는 수수께끼 풀이!
집 앞에 도서관을 품게 된 덕분에 그동안 미뤄왔던(아니 보지 못했던) 다양한 추리 소설을 탐독하고 있는데 가장 사랑하는 히가시노 게이고 책은 말할 필요도 없고(심지어 두 번째 읽는 중. 원래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않는데, 하물며 범인 찾기가 핵심인 추리 소설은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내용을 까먹은 책만 읽고 있다) 요즘 즐겨 읽는 작가 중에는 나카야마 시치리, 그리고 이케이도 준이 있다.
이케이도 준을 처음 만나게 된 책은 프랑스에서 전자도서관으로 대출했던 <한자와 나오키>이다. 한때 J pop에 빠졌을 당시 좋아했던 타키자와 히데아키가 속한 타키&츠바사 같은 느낌의 한자&나오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주인공 한 명의 이름이었다. 제목만 봐서는 별로 땡기지는 않았지만 전자도서관에는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읽게 되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이케이도 준은 은행원 출신으로 주로 경제, 은행 관련 소설을 쓰는데 <한자와 나오키>도 역시 은행원인 주인공이 은행 내부의 비리, 파벌 싸움 등에 맞서는, 경제와 은행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살인의 '살'자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땀을 쥐게 만드는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실제로 이케이도 준의 프로필에는 일본 최고의 스토리텔러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의 5번째 작품인 <한자와 나오키 : 아를르캥과 어릿광대>가 최근 출판되었다. 전통 있는 미술출판사를 인수하려는 신흥 IT 기업의 음모와 위대한 화가의 미발표작에 숨겨진 비밀이 버무려진 은행과 미술이 얽힌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눈에 띄는 건 단연코 '아를르캥과 어릿광대'라는 부제. 소설에서는 '아를르캥'을 피에로와 함께 이탈리아 희극에 등장하는 인기 어릿광대라고 소개했다. 이탈리아 희극인데 웬 프랑스어 같은 단어가? 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를르캥Arlequin은 프랑스어로, 이탈리아어로는 아를레키노Arlecchino, 영어로는 할리퀸Harlequin이라고 한다. (할리퀸이 뭔지 이제야 알았네!)
좀 더 자세히 소개하면, 아를레키노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여러 가지 빛깔의 마름모꼴 옷을 입고 16세기에 등장한 이탈리아의 희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즉흥극)에 나오는 캐릭터이다. 트럼프 카드에 그려진 조커 캐릭터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피에로Pierrot 또한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나오는 캐릭터이자 우리가 잘 아는 그 피에로로, 아를르캥과는 다르게 흰색의 의상에 가면을 쓰지 않는 대신 흰 가루를 묻힌 얼굴을 한다. 역시 소설에 따르자면 교활한 아를르캥과 순수한 피에로의 대비는 화가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 중 하나라고 한다.
아를르캥이 무엇인지 알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앙투안 와토Antoine Watteau의 그림이었다. 와토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서양미술사조인 로코코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3대장(앙투안 와토,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중 한 명으로, '페트 갈랑트 Fête galantes'라는 장르로 유명한 화가이다. 'Gilles(질)'이라고도 불렸던 그의 그림에 피에로 복장을 하고 서 있는 남자가 와토 본인을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와토를 떠올릴 때면 항상 이 그림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마치 피에로가 곧 와토인 것처럼.
두 번째는 루브르 박물관 옆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는 진짜 아를르캥과 피에로이다. 제목 그자체로 'Arlequin et Pierrot'를 그린 그림. 다양한 컬러의 마름모꼴 의상을 입은 아를르캥과 검은 모자를 쓰고 흰 의상을 입고 있는 피에로를 대비시켰다. 화가는 앙드레 드랭André Derrain으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함께 야수파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이 그림에서는 야수파의 특징이 별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는 이 작품에서는 독창적인 아를르캥과 피에로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한쪽 다리를 들고 기타를 연주하는(하지만 현은 없다!) 두 피규어는 중립적인 배경에서 마리오네트나 꼭두각시처럼 끝없는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시선은 서로 마주치지 않고 얼굴의 표정은 심각해 보인다. 이를 통해 그림은 어떤 멜랑꼴리를 발산한다(고 미술관은 설명한다).
세 번째는 폴 세잔Paul Cézanne의 Mardi Gras(Pierrot et Arlequin). 세잔의 그림은 주로 정물화(+생트 빅투아르 산)가 유명한데, 이렇게 세부적인 인물화를 본 건 거의 처음인 듯하다. 아를르캥과 피에로를 찾아보면서 처음 본 작품이다! 모스크바에 있다는데 러시아 갔을 때 봤으면 좋았을 것을... 마르디 그라는 프랑스 문화수업 시간에 꼭 배우는 프랑스의 축제 중 하나로 사육제의 마지막 날, 재의 수요일 전날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 마르디 그라에 맞춰 카니발 의상을 입은 두 젊은이를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은 평소 세잔의 그림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났다. 두 젊은이의 의상, 특히 깃이나 신발 버클 등을 디테일하게 묘사했고 그림에는 표정이 살아 있다. 아를르캥의 오만함과 냉소, 피에로의 무성의한 수줍음과 비밀을 담았다(는데 그렇게 느껴지는지?).
미술사를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그림 분석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대부분의 설명은 박물관이나 기사 등의 참고자료를 따왔다. 특히 그림은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해석은 사실 잘 이해할 수가 없다. 다만, 요새 가장 즐겨 읽는 이케이도 준의 <한자와 나오키> 신간 부제가 '아를르캥과 어릿광대'였고, '아를르캥'은 분명 프랑스어일 거라 생각했으며, 또 '아를르캥과 어릿광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나니 가장 사랑하는 사조의 프랑스 화가의 그림이 떠올랐을 뿐이다. 재밌는 것은 소설 속에 나오는 미술출판사와 위대한 화가 역시 파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미술출판사 선대 사장의 자녀는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했고, 그의 삼촌 역시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또 위대한 화가는 다른 나라가 아닌 꼭 프랑스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싶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이 중에서 훗날 위대한 화가가 되지만 당시에는 화가 지망생에 불과했던 미술학도는 풍운의 꿈을 품고 파리에 도착해 화가로서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만 재능 없는 자신을 발견하며 우울한 파리 날씨처럼 점점 가라앉는,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감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사실 나 또한 파리는 실력이 있는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가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지만 넘을 수 없는 언어의 벽, 그보다 더 뛰어넘을 수 없는 프랑스인들의 미술사적 베이스에 좌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차라리 언어나 인종이 필요 없이 실력만 뛰어나면 되는 예술가였다면 더 나았을 텐데 왜 하필 서양 미술사를 선택했나 생각한 적도 있지만(그렇다고 전공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예술가는 그 누구와도 아닌 재능 그 자체와 맞서 싸워야 했을 테니 아마 그 역시 쉽지 않은 길이었을 것이다.
세계적 예술사조를 만든 나라, 세계적 예술가들이 즐비한 나라. 예술가들이 꿈꾸는 나라. 그리고 여전히 예술을 대표하며 예술의 소재가 되는 나라. 아무튼 프랑스는 매력적인 마성의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아, 물론 예술에 한정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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