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초반.. 유럽으로 가는 국제선이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변경되고, 비디오 대여 가게에서 한국 프로그램 녹화 비디오를 빌려보던 시절에서 전화방에서 국제전화를 하던 때를 거쳐 카카오톡으로 언제든 한국의 가족, 친구와 대화할 수 있는 스마트폰 시대까지... 강산이 2번이나 변하는 넘는 시간을 지나 유럽과 한국을 왔다 갔다 했지만 최근까지도 유럽에서 한국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지난 글(https://rapha-archives.tistory.com/110)에서 말한 대로 자포니즘에서부터 지금의 망가 등의 J-culture까지 오래전부터 유럽이 짝사랑하던 일본, 땅덩이 자체로 위압적인 중국, 그리고 전 세계적 관종인 북한 사이에 낀 한국의 위치상 유럽이 보기에 한국은 매력적이거나 또는 크게 각인될만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위상을 갖게 된 건 약 99%가 k-pop을 위시한 k-드라마, k-영화... 즉, 한류(vague coréenne)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k-pop 역시도 소수만 좋아하던 덕후 문화에 불과했을 뿐이다. 1세대 아이돌 팬클럽 출신인 나조차도 유럽 사람들이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는 게 이해가 안 갔을 정도였으니... 심지어 2013년 프랑스에서 방탄소년단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계기는 BTS라고 불리기도 전부터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던 독일 친구 때문이었다. 그때는 이름이 그게 뭐야,라고 웃었는데 정말 이런 세계적인 스타가 될 줄은 전혀 몰랐지..(저는 진이 제일 좋습니다) BTS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꾸준히 세계 시장을 두드린 결과 pop culture라는 말 그대로 대중이 즐기는 문화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날로 변해가는 한국의 위치를 직,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직접적 경험으로는 보통 중국? 일본? 에서 왔냐고 먼저 물어보던 것과는 다르게 점점 (처음부터)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아졌단 것이고 또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ah, Corée~라고 하며 한국을 아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지금은 당연한 것 같아도 정말 큰 변화이다...). 그리고 외신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 간접 체험을 했는데, 한국에 대한 기사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만큼 한국에 대한 관심이나 한국의 국력이 늘어났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관심이 늘어난 만큼 유럽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 또한 제대로 전달되고 있을까?
얼마 전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의 한복 논란으로 한국 사회가 떠들썩했다. 스포츠 경기에 애국심을 강요하지 말라며 한국과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붙었을 때 프랑스를 응원했던 내가(그때는 명예 프랑스인이라기보다는 프랑스의 D 선수를 너무너무 좋아했었다...) 열불이 날 정도로 화가 났던 장면이었다. 그 뒤에 경기 관련 논란은 말할 것도 없고. 빅토르 안이 소치에서 금메달을 딴 게 4년 전이 아니라 8년 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 쏜살같이 흘러간 세월에 대한 무상함과 (하긴, 밴쿠버 올림픽 끝나고 학관에서 밥 먹다 말고 곽윤기 선수와 사진 찍으러 뛰쳐나갔던 게 벌써 12년 전...) 찝찝함만 남긴 동계 올림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야욕의 절대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됨을,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으로 의미가 있었던 행사였다.
중국의 동북공정, 그리고 문화판 동북공정은 이번 한 번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처럼, 한국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한국의 정보가 잘못된 것인지, 혹은 중국의 문화 공정이 먼저라 그 때문에 한국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신을 다루다 보면 유럽에서 한국 문화나 역사가 중국의 것, 혹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제법 있다.
첫 번째 설날. 한국의 음력설을 Nouvel An chinois(Chinese New Year)라고 표시하는 경우
사실은 나도 음력 설날이 중국의 춘절이 원조이고, 중국 것을 따라 쓰는 것인 줄 알았다. 나조차도 이런 인식인데 서양 사람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비록 설날이 중국 태음 태양력의 첫날이긴 하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음력설을 사용하고 있고 그에 따른 각 나라의 고유한 전통문화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Nouvel An lunaire(Lunar New Year)으로 쓰는 것이 맞다. 중국 설이라고 하면 각 고유의 문화가 중국 것이라고 오해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최근까지도 꽤 심각해서, 얼마 전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에서 Chinese New Year 표기를 막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22/02/93517/
두 번째 김치. '한국은 곧 김치'라는 인식이 콱 박혀 있는 덕분에 대놓고 김치를 중국의 파오차이 또는 일본의 기무치라고 하지는 않지만 중국의 문화 공정에 이용될 만한 우려가 있다. 양배추(chou)와는 다르게 배추는 프랑스어로 chou chinois(중국 배추)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김치와 관련된 기사에서 chou chinois라는 단어를 자주 볼 수 있다. 지금이야 어떨지 몰라도 워낙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어메이징한 시대이기 때문에 김치를 설명할 때 이 chou chinois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추후 중국의 김치 동북공정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그저 기우에 불과하길 바란다.
자매품으로 중국과 대만 음식을 한국의 특산물이라고 소개하며 한국 식당을 홍보하는 기사, 반대로 김치가 들어간 음식을 중국의 특산물(카라아케까지 들어간 거 보니 아시아 음식 짬뽕 같기도 하지만...)로 소개하는 기사 등이 있다.
세 번째 의학. 내가 제일 화났던 기사들이 바로 이것이었다. 위의 것들은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라고 넘어갈 수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중국의 동북공정의 영향으로 설날이 춘절이 되었는지, 혹은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그랬는지 뭐가 먼저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심지어 배추의 경우는 배추라는 단어를 정말 중국 배추라고 쓰니까...) 아래 기사들은 다분히 부정적인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스위스에 중국 병원이 들어섰다는 기사로 기사에서는 스위스에 세워진 중국 병원의 중국인 의사의 말을 인용하였다.
중국 의학은 2천 년이 넘은 오래된 전통이다. "중국은 물론 베트남, 한국, 일본에서도 중국 의학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중국 의학은 아시아 의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Meyrin의 병원 중국의학 전문의인 Hongguang Dong가 설명하였다. "이 의료 시스템은 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한의학의 뿌리가 중국 의학이라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 또는 스위스에 세워진 중국 병원처럼 한국에도 중국 의학이 도입되었다는 것. 뭐가 되었든 둘 다 틀렸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중국과는 관련이 없지만 역시나 부정적인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기사였다. 벨기에 기사로 스웨덴 말뫼의 '역겨운 음식 박물관'이라는 곳에 똥으로 만든 술이 한국의 전통 요법으로 사용되었다고 전시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AFP통신의 보도로 벨기에뿐만 아니라 한국과 프랑스 등에도 기사화되었다.
"박물관에서 똥으로 만든 술과 고환으로 만든 맥주를 전시하고 있다 : 이것은 한국 전통의학입니다."
한국에서 똥술을 사용했다는 사례가 있지만, 그런 사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통의학이라고 말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제목에 부각하면서 마치 똥으로 만든 술과 고환으로 만든 맥주가 한국 전통의학이라고 오해할 수 있게끔 하였다. 같은 내용의 프랑스 기사와 비교했을 때 벨기에의 것이 더 심각해 보인다.
누군가는 별 것 아닌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의 힘으로 유럽에서 한국의 위상이 순식간에 높아진 것처럼 문화의 힘은 조용하지만 강력하다. 다음 기사를 보면 문제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기사는 <설날이 중국의 '소프트파워' 도구가 될 때>라는 제목의 기사로(이 글의 제목을 이 기사에서 따왔다) 한국을 포함한 베트남 등에선 '(음력) 설날'이라고 부르지만 중국의 정체성, 민족주의 정치의 부상, 중국 중심주의 사고의 반영으로 중국은 해외에서 '중국 설날'이라는 용어를 계속 홍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도 이 중국의 문화적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줄어들긴 했어도 여전히 공식 웹사이트나 미디어에서 '중국 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비단 '중국 설'이라는 용어뿐만 아니다. 언젠가 '중국 배추'의 영향으로 언젠가 김치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복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번 기회를 거울 삼아 경계하고 대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샌가 문화의 침탈은 턱밑까지 추격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 빼앗기고 말지도 모른다.
아래 기사 전문
P.S.
2021년 음력설을 축하하는 마크롱 대통령의 연설. 다행히도(?) 그는 '중국 설'대신 '(음력) 설날'을,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베트남, 그리고 동남아시아까지 언급하며 음력설을 축하했다. 최근 올림픽에서의 논란과 그에 대처하는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서 매년 앞다투어 중국에 새해인사를 하던 정치인들의 과거가 다시 한번 핫한 이슈가 되었다.
'한 나라'만 꼭 집어서 인사하기보다, '여러 나라'의 문화를 인정해주는 게 진짜 외교적인 모습이 아닐까?
마크롱 새해 인사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3wnVJRUms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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