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자신만의 취향이 있다. 취향이란 단어가 좀 거창하다면 좋아하는 색, 좋아하는 꽃, 좋아하는 향수,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책... 이렇게 '좋아하는' 뒤에 명사를 붙이면 그게 자신의 취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취향이 참 확고하다, 취향이 참 한결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 나의 취향은 로코코와 아르누보로 대표되는 화려한 색감, 화려한 양식, 화려한 장식 예술 스타일이다. 건축 문화유산으로 연구 주제를 정하기 전 로코코와 아르누보를 연구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을 정도이니. 이런 류의 스타일에 환장하는 나에게 화려한 양식의 성처럼 생긴 분홍색의 미스터리한 호텔(심지어 산속에 덩그러니 놓은 호텔과 같이 고립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는 추리소설 마니아가 좋아하는 구성이기도 하다!)이 전면에 등장하는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포스터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원래 영화관도 잘 안 가는 데다 프랑스에서는 더더욱 영화관에 안 갔던 나지만 이 영화는 꼭 봐야 했다. 당시 존댓말 할 정도로 전혀 친하지 않던 남편과 영화 전공이라는 이유로 같이 영화를 보러 갔었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의도치 않게 우리의 첫 영화가 되었다. 물론 그 사람은 절대 그냥 영화만 보러 간 것은 아니었지만.
책과 마찬가지로 한 번 본 영화도 다시 안 보는지라 영어+프랑스어 자막으로 이해한 영화의 내용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영화 내내 나오는 벨 에포크적 감성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렇게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꼭 봐야 할 리스트에 추가되었다. 아쉽게도 하필 백신 패스와 겹쳐 얼마 전 개봉한 '프렌치 디스패치'는 보지 못했지만, 환불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우연히 웨스 앤더슨' 전시는 백신 패스가 해제되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진짜, 나는 이 전시가 웨스 앤더슨이 영감을 받은 건물들을 찍은 사진 전시회인 줄 알았는데. 전시회 방문한 당일날까지도. 알고 보니 미국의 한 부부가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에 등장할 만한 장소를 찍은 것들이었다. 심지어 전부 부부가 찍은 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제보를 받은 사진도 포함되었다는 것! 아니 이렇게 사전 준비도 안 하고 'accidentally'하게 전시회 가도 되는 거 맞아?
코로나로 오랫동안 억눌렸던 여행 욕구에 대한 대리만족 때문이었는지, 주말까지 낀 간만의 황금 설 연휴 때문이었는지, 혹은 사진 찍기 좋은 장소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우연히 웨스 앤더슨' 전시회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거의 10년 전에 박물관에서 일하다가 지금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친구는 전시회 사진을 보고 전과는 다르게 한국도 사진 찍기 좋은 트렌드로 전시가 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대부분 20대의 젊은 관람객들이었다. 나는 박물관학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트렌드의 변화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개인적으로 나 스스로 놀란 것은, 나는 무조건 옛날, 과거, 원작(박물관 전시에 원작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기에는 이상하지만) 옹호 주의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모르는 분야라 그런가 변화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단 것이었다. 나도 밀레니얼 세대라구.
전시에 관해서는 일단 건물 사진이 대부분이라 자칫 뻔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테마별로 잘 구성해 놓은 것 같았다. 특히 Cool Pools나 Relax in Nature와 같이 다양한 여행의 테마로 분류한 것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디자인 등등. 물론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다. 나도 어떻게 한국어로 번역해야 자연스러울 수 있을지 매일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원문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는 번역투의 말들이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번역했다면 더 자연스러웠을까? 쉽지 않은 문제이다.
전시회에 걸린 사진 속 건물은 전부 내 취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예쁜 색감의 건물들, 화려한 양식, 아름다운 무늬... 그리고 유럽 곳곳에서 만난 추억들까지도. 내가 왜 유럽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왜 미술과 건축을 좋아했는지, 그러다 최종적으로 왜 건축 문화유산에 꽂혀 문화유산 보존과 복원에까지 이르렀는지 오랜만에 초심을 돌아보게 되었다. 난 그냥 이런 아름다운 건물들이 너무 좋았다. 그냥 좋았을 뿐이다. 대놓고 유명한 건축물, 기념물뿐만 아니라 파리를 걸어 다니며 우연히 마주치는 아르누보풍 대문, 건물 창틀 밑에, 그리고 코너에 조각되어 있는 머리와 기둥 장식들, 돔 지붕, 건물에 새겨진 건축가 이름과 연도,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는 발코니 난간 그리고 거기에 매달려 있는 꽃 화분까지. 파리에선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지만, 그래서 나 역시도 어느 순간 너무나 익숙해졌던 것들이었지만 어느 날 눈을 들어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디테일을 다시 발견하는 때, 평범하고 뻔한 일상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또 난 건축을 사랑했다. '우연히 웨스 앤더슨'은 이런 내 안의 순수 열정을 깨닫게 해 준 전시회였다.
자꾸만 나의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었다. 아마도 그동안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코로나 시국에서의 의식의 대전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모르고 지나쳤던 시간이, 그 1분 1초가 아까워서. 아니, 이건 최근에 생긴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인문학도의 고백처럼 학문으로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랜 시간 나를 지배해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술사 학생들이 '시대'와 '그림'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쓸 때, 나는 그림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예술을 둘러싼 사회와 예술이 탄생하게 된 배경 등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로코코를 좋아했지만 연구 주제로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다행히 취향도 맞고 의미도 있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복원이라는 나름의 중요한 주제까지 도달하게 되었지만 코시국 이후 왜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하는지 또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확고한 취향을 가진 데다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했지만, '의미'라는 강박관념은 취향의 사전 뜻 그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대로 나를 흘러가지 못하게 가두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진 속 건축물들은 정말 순수하게 건축물을 좋아하던 내 마음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건축문화유산에 대한 취향, 건축을 좋아하는 마음,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 며칠 전의 나라면 '그래서 이런 거 좋아해서 뭐할 건데?'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취향을 향해 가는 자연스러운 마음을 억지로 억눌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좋아하는 것이 곧 일이 되고 돈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현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웨스 앤더슨 감독 스타일 장소를 포착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를 하여 팔로워 150만 명에 이르는 크리에이티브 커뮤니티로 성장해 전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회를 여는 콘텐츠가 되고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우연히 웨스 앤더슨'이 증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든, 영감은 당신 눈앞에 있다'는 부제가 보여주듯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며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곧 영화가 되며 예술이 되는 창조적 영감을 선사하는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번뜩이며 날카로운 시각을 잃지 않으며 한국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는 이어령 교수님을 빗대자면 이러한 힘은 창조의 원천이다. 이름처럼 우연히 마주한 '우연히 웨스 앤더슨'에서 세상의 모든 진지함과 고뇌는 다 짊어졌던 나는(실제 그렇게 살았는지와는 상관없이) 무거움은 잠시 내려놓고 좋으면 그냥 좋아해도 괜찮다는 뜻 밖의 위로를 만났다. 플러스, 취향을 가지고 어떻게 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도 같이.
P.S.
돌아다니면서 나도 예쁜 건물들 많이 찍었었는데, 일단 지금 휴대폰에 있는 사진만 몇 장 투척!
작년 러시아 출장 갔을 때. 극성수기였지만 코시국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진 보니 또 가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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