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바스티유, 그리고 Fête nationale
+)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글을 한데 모으는 작업 중
이 글은 프랑스 예술, 미학, 미술사학과 학생 모임에서 썼던 글인데
석사 논문의 챕터 중 하나를 요약한 것이다.
프랑스 그리고 파리의 상징은 단연 에펠탑이다. 이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에펠탑이 1년에 한 번, 화려한 빛과 음악에 물들며 성대한 불꽃놀이의 축제의 장으로 변신하는 날이 있다. 그날은 바로 7월 14일, 프랑스의 국경일인 Fête nationale이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국가의 축제’. 도대체 이 날은 어떠한 날이길래 국가적인 축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여기서 잠깐, Fête nationale의 한국어 명칭을 살펴보도록 하자. ‘혁명 기념일’. 좀 더 그 유래에 근거하여 번역한 말이다. 그렇다. 이 날은 프랑스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기념하여 만든 국경일이다.
그렇다면 왜 프랑스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프랑스 최대의 국경일로 지정이 된 것일까? 에펠탑의 화려한 불꽃놀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더 의미 있게 불꽃놀이를 즐기고 Fête nationale을 기념할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혁명
프랑스혁명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역사적 사건이다. 학창 시절 세계사 과목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수업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앙시앵 레짐으로 대표된다. 앙시앵 레짐은 토지 경작에 기반을 둔 낡은 경제 제도 위에 성직자와 귀족, 두 상위 신분이 누린 특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사회적 신분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것은 신권으로부터 유래하였다고 여겨졌다. 민중은 그것을 깨달을 만큼 배우지도 못했고 게다가 종교는 이미 민중들의 일상생활을 오랫동안 관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낡은 믿음을 의심해 볼 만한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그 두 신분 위에, 모든 권력 즉 행정, 사법, 입법권을 가지고 있는 왕이 존재했다. 이것이 구체제이고 앙시앵레짐이다.
그러면 왜 1789년이었을까? 역설적이게도 18세기가 풍요의 세기였기 때문이다. 왕국의 인구는 증가했고 농산물 가격과 가치가 상승했다.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자 소작료가 인상되었는데 여기서 이득을 본 사람은 농민이 아닌 토지 소유자, 즉 지대 수입으로 살아가는 영주와 성직자 등의 특권 계층이었다. 농민의 불만은 당연히 지주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번영하고 있는 도시에서 혜택을 보던 부르주아지도 나타났다. 그들 역시 모든 분야에서 강화된 귀족의 특권으로 인해 분노하고 있었다. 또한 디드로, 달랑베르 등의 백과사전파와 같은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반종교적 사상이 퍼져나갔다. 이렇게 인구적, 경제적, 지적 여건이 변함에 따라 체제의 균형이 점차 흔들리게 되었고, 전통 체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앙시앵 레짐은 바스티유라는 상징에 너무 갇혀 있다.” 프랑스와 퓌레 François Furet와 드니 리셰 Denis Richet의 책 프랑스혁명사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 말은 결국 앙시앵 레짐으로 나타나는 프랑스혁명은 곧 바스티유라는 말을 반증해준다. 즉, 프랑스혁명의 시작은 바스티유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바스티유
바스티유는 1370년 Charles V에 의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두 개의 탑에 하나의 문을 강화하였다가 그 후 2개의 탑이 추가로 건립되었다. 그리고 4개의 탑이 더 추가되어 총 8개의 탑이 되었다. 바스티유의 건립 목적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예방하고 도시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이 머물던 오뗄 생-뽈 l’hôtel Saint-Pol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점점 국경이 잘 갖춰지면서 더 이상 바스티유의 군사적 특성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결국 1400년대에 이르러 바스티유 북쪽에 새로운 관문이 건설되고 바스티유는 원래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그때부터 1789년까지 바스티유는 반체제 인사 및 왕권에 위협적인 적들을 가두기 위한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두꺼운 벽과 지하 감옥, 그리고 바스티유의 수비대는 보안과 비밀유지를 위해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바스티유는 왕의 독재의 상징이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투옥된 것으로 유명한 콩시에르주리 Conciergerie, 빈민, 부랑자, 정신병자 등을 수용하던 비세트르 Bicêtre 병원 등과 같은 시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바스티유가 증오와 공포의 상징이 되었을까? 외관상 거대하고 혐오감을 주는 이 요새는 군중들의 소요 때에 군사적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 18세기에 들어서서 바스티유가 독재 정권의 최고 상징이자 중세 봉건시대를 전형적으로 상징한다는 의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리 중심지에 우뚝 서있는 바스티유의 성탑은 봉건 제도의 음산한 유산으로 보였다. 국왕의 영장과 불법 투옥은 더욱더 바스티유의 불길한 악평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미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바스티유의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루이 16세였다. 1785년부터 그는 비싼 보수 비용과 점점 덜 사용한다는 이유로 바스티유를 없애는 것을 검토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1789년의 여름 파리는 끓고 있었다. 사람들은 루이 16세의 막대한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소비된 식량 부족과 세금 부담을 겪고 있었다. 자크 네케르 Jacques Necker (1732~1804) 재무 장관의 해임은 많은 파리 사람들을 분노케했다. 파리 시민에게 있어 네케르의 해임은 빵값의 가파른 상승, 그리고 국가의 파산을 의미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을 자극한 것은 1789년 6월 초부터 루이 16세가 파리 주변에 군대를 집중시킨 것이다. 도시의 군대화가 초래한 위협으로 인해 군중의 폭동이 시작되고 무기 판매점을 약탈한 군중은 병기고 습격을 계획해 앵발리드로 간다. 그곳에서 소총 2만 8000정, 대포 5문을 약탈했다. 이어 화약이 바스티유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모든 군중이 바스티유 요새로 몰려갔다.
감옥에 도착하여 사령관 드 로네이 de Launay 와 대표단이 무기 인도에 관해 협상하였지만 결렬되었다. 요새 밖에서는 군중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흥분 상태는 고조되었다. 사령부 안마당으로 통하는 도개교가 내려지며 습격이 시작되었다. 의자, 테이블, 옷장 등 던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창문 밖으로 던져졌다. 또한 죄수 관련 기록과 소송 서류, 체포 영장 등 찢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찢겨 흩어지고 불태워졌다. 군중들은 바스티유 전체를 장악하고 투옥되어있던 7명의 죄수를 석방하면서 바스티유 감옥은 함락되었다. 바스티유의 침략은 98명의 사망자, 60여 명의 부상자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스티유 사령관 드 로네이 de Launay 는 시청으로 끌려가 살해당했고 시장 자크 드 플레셀 Jacques de Flesselles도 살해당했다. 성난 군중들은 그들의 목을 창으로 찔러 거리를 활보하였다. 이 날을 기점으로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고 구체제의 압제로 대표되던 바스티유의 함락은 그 자체로 신화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Fête nationale
1880년 제3 공화국 정부는 Fête nationale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여러 후보들 중에 7월 14일이 주목받았다. 국민회의 (지금의 Assemblée nationale) 의장이었던 레옹 강베타 Léon Gambetta (1838~1882)는 7월 14일을 ‘민중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칭하였다. 곧 7월 14일을 fête nationale로 지정하는 법안이 공포되었다. 사실, 바스티유 습격의 목적은 독재 정치의 상징을 습격하기보다는 바스티유 감옥에 저장된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스티유 함락의 상징적인 의미는 여전히 남아있어 매년 Fête nationale로 기념된다. 이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산업 경제가 도래하고 도시화가 전개되며 국민국가가 대두하기 시작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럽에서는 건축물과 기념물의 건립, 공식 의례 설립 등을 통해 전통을 창조하고자 하였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복종과 충성심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정당한 국가 Nation를 만들기 위해서 의례나 레토릭 그리고 상징물이 필요했고 그것이 곧 전통의 창조가 되었다. 그러한 일환 중 하나로 프랑스에서는 1880년에 바스티유 함락의 날을 fête nationale로 제정하고 라 마르세예즈를 국가(國歌)로 지정한 것이다.
런던의 런던 탑,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 나폴리의 누오보 성, 그리고 다른 많은 수도들은 자신들의 기념물을 지켰다. 반면에 바스티유는 사라졌다. 한스위르겐 루스브링크 Hans-Jürgen Lüsebrink 와 롤프 레이차트 Rolf Reichardt 에 따르면 혁명에서의 정의의 개념은 곧 죽음뿐만 아니라 물리적 해체와 국가의 적을 완전히 파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789과 94년 사이에 자칭 재판관과 사형 집행인들에게 있어서 앙시앵 레짐의 권력에 대항하는 범죄와 같이 국민이나 국가에 대항하는 범죄는 유죄 당사자의 완전한 물리적 파괴에 의해서만 보상이 될 수 있었다.‘ 건물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바스티유는 앙시앵 레짐에 대항한 민중의 혁명적 아이콘이 되었다. 사라져버린 그의 운명과 국민 국가 위에 만들어진 전통 거기에 200년이 넘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역사의 신비로움까지 더해져 매년 7월 14일마다 바스티유의 신화는 점점 더 쌓여져 가고 있다.
P.S 올해부터는(글 쓴 날이 2018년 여름이었음) Fête nationale 바로 다음 날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 축구 대표팀 French national team의 신화까지도 함께!
P.S 2 ㅠㅠ 한국에서 지내느라 올해 7월 불꽃놀이는 패스..
뉴뉴 파리 가고 시퍼랑~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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