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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건축 산책 Architecture parisienne

파리 건축 산책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 건축

RAPHA Archives 2020. 8. 28. 12:07

+) 모임의 마지막 글. 벨 에포크 시대의 건축을 한 번에 다 담을 수가 없어 시리즈물로 기획했는데 아쉽게 1편에서 끝나고 말았다. 과연 2, 3, 4...는 계속 나올 수 있을까. 마감이 없으면 글을 쓸 수가 없엉..

파리 건축 산책 -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 건축.

도시, 예술이 되다.

 

 

1.파리의 지하철

 

Art history를 전공한다고 하면 어떤 시대, 어떤 작가를 공부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보통 회화를 공부한다고 많이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이 아닌, 문화유산 그것도 건축 문화유산의 보존에 대해 공부한다고 하면 기대하던 대답이 아님에 당황하거나, 혹은 건축 문화유산에 대해 낯설어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가 흔히 “미술사”라고 부르는 Art history 안에는 미술 그리고 좀 더 세분화되어 회화라는 것이 존재한다. 건축도 그 일부분이다. 물론 Architecture history 라는 전공이 따로 있기도 하지만 그 역시도 Art history 안의 세부 전공이다.

 

그러면 아주 가끔, 왜 문화유산, 그것도 건축 문화유산이냐고 궁금해한다. 물론 대가들이 그린 원본을 직접 눈으로 보러 가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온실 속의 화초처럼 빛과 습도 등 모든 환경을 24시간 통제당하면서 미술관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회화보다는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받아 그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며 일상의 한 풍경이 되는 건축물이 마음을 더 끌어당긴다.

 

그런 면에서 파리는 건축 문화유산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발길이 닿는 어디든 문화유산이 아닌 곳이 없다. 성수기의 몇 시간의 인내 끝에 미술관 입장권 사는 것에 성공하더라도 좀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16세기 이탈리아 여인 (모나리자)에 반해 19세기 철의 여인 (에펠탑)을 만나기 위해서는 긴 줄도, 오랜 시간도 필요하지 않다. 파리 어디에서나 그녀를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물론 철의 여인의 내부를 방문하고 싶다면 루브르 입장에 준하는 시간과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시작하는 파리의 역사는 각기 다양한 시대의 건축물을 남겼고, 파리는 아직까지도 그것을 간직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번 칼럼에서 살펴볼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벨 에포크” 즉 아름다운 시대로 불렸던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시대의 건축이다.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를 보여주는 그림 Henri Gervex, Une soirée au Pré-Catelan, 1909, Musée Carnavalet, Paris

 

 

 

프랑스어로 “좋은 시대” , “아름다운 시대”라고 부르는 벨 에포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평화와 번영의 시절을 가리킨다. 그러한 풍요를 증명이라도 하듯 건축에서도 크나큰 변화가 있었다. 중세 시대의 도시 계획에 머물러있던 파리는 현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듯하고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한다. 그 과정에서 중세시대 파리의 오래된 문화유산이 손실되기도 했지만 새로운 재료가 건축에 사용되기도 했다. 바로 산업 시대를 대표하는 철의 도입이다. 19세기 중반은 철 건축의 황금기 와도 같은 시대이다. 기차역, 런던 만국박람회의 수정궁 등 산업혁명이 이뤄낸 업적인 철, 그리고 유리는 건축을 만나 건축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써 나갔다.

 

 

철로 만든 건축물의 상징, 기차역 Charles Riviére, Gare du chemin de fer du nord, ©Photo RMN-Grand Palais - D. Arnaudet

 

 

 

 

물론 이러한 변화에 누구나 다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철은 그저 건축 재료 중 하나였을 뿐 그것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었다. 그 중 한 명이 파리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오페라 가르니에 (Opéra Garnier)를 지은 샤를 가르니에 (Charles Garnier)였다. 그는 철로 만들어진 파리 지하철이 야외로 나와 시를 관통하여 파리의 미관을 해치는 모습을 못마땅해했다. “파리는 공장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 파리는 박물관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철골구조물을 (건축 재료로)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돌과 대리석, 청동 그리고 (그 재료들로 만들어진) 조각과 승전 기념비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술과 기술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오스텔리츠 역 (Gare d’Austelitz)과 리옹 역 (Gare de Lyon)을 가로지르는 오스텔리츠 다리 (Viaduc d’Austelitz. Viaduc은 육교, 고가 다리라는 뜻이고 오스텔리츠 다리를 뜻하는 Pont d’Austelitz도 따로 존재하지만 편의상 오스텔리츠 다리라고 부른다)는 그 당시 기술과 장식의 대담하고 참신한 시도를 잘 보여준다. 건축가는 두 개의 아치와 그 측벽 위에 선로를 놓았다. 센 강을 다니는 배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기둥과 부벽과 같은 요소를 압축하는 대신 보사쥬 기법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보사쥬 기법. 돌 표면에 돋아나오게 한 돌기)의 돌 혹은 콘크리트를 겹쳐 사용함으로써 견고함과 장식성을 동시에 주고자 하였다. 거대한 트러스보 (부재를 삼각형으로 짜 맞추어 지붕이나 교량 따위에 쓰는 보)는 원래 상태 그대로 사용하였다. 다리의 아치 밑에는 물고기, 노, 닻, 삼지창 들 바다를 뜻하는 여러 상징물과 파리 시의 문장이 함께 장식되었다.

 

오스텔리츠 다리 ©Pascal3012

 

오스텔리츠 다리 아치의 하단에 있는 장식 ©Immediatic

 

 

 

이번에는 에펠탑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 중 하나인 비르아켐 다리 (Pont de Bir-Hakeim, 옛 이름 Viaduc de Passy)를 보자. (사실 철로 만들어진 에펠탑도 초기에는 흉물로 여겨졌다는 역사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에펠탑을 보러 간 사람 중에 그 다리를 유심히 관찰해 본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 인셉션을 촬영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친숙할 수도 있겠지만.. 이 다리 역시 오스텔리츠 다리와 함께 철골 건축물을 하나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만들기 위한 건축가의 의도가 잘 나타난다. 다리 중간에 위치한 석조 개선문이 철로 된 2층의 다리를 양 옆으로 연결한다. 거대한 느낌의 곡선형 도로는 지하철이 다니는 가벼운 윗층과 대조를 이룬다. 지하철 선로는 아름다운 아르누보 스타일의 기둥들이 받쳐주고 있다.

 

다리의 아래에는 귀스타브 미쉘 (Gustave Michel)이 만든 두 그룹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파리 시 문장과 함께 조각된 뱃사공들. 그들은 그물, 부표 돛 등을 들고 있다. 한 쪽에는 RF (République Française, 프랑스 공화국) 문장과 더불어 대장장이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두 그룹은 그 당시 센 강의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던 두 개의 직업을 나타내고 있다. 다리 중간에 있는 아치에도 석상이 장식되어 있다. 쥘 펠릭스 쿠르탕 (Jules-Felix Courtan) 의 과학과 노동, 그리고 장 앙투안 앙잘베르 (Jean-Antoine Injalbert)의 전기와 상업의 알레고리가 그것이다.

 

비르아켐 다리의 조각 1 왼쪽 : 대장장이 오른쪽 : 뱃사공

 

 

 

비르아켐 다리의 조각 2 왼쪽 : 과학 오른쪽 : 노동

 

 

 

비르아켐 다리의 조각 3 왼쪽 : 전기 오른쪽 : 상업 출처 : http://paris1900.lartnouveau.com/ponts/pont_bir_hakem/pont_bir-hakeim_sculptures.htm

 

 

 

건축물을 조금 더 돋보이고자 하는 건축가들의 이러한 여러 가지 시도는 예술과 기술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파리 시를 관통하는 지하철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이자 역사적 기념물이 되었고 샹젤리제 극장 (Théâtre des Champs-Elysées)와 같은 1920년대 현대건축의 탄생을 예고한다.

 

 

다시 지하철로 돌아가보자. 이번에는 지하철 입구이다. 벨 에포크 시대에 유행했던 사조 중에 아르누보가 있다.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미국으로 넘어가기 전 화려했던 프랑스의 위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프랑스어 명칭을 그래도 사용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예술 사조 중 하나이다. 아르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축가는 바로 엑토르 기마르 (Hector Guimard). 그의 스타일이 곧 아르누보의 스타일이며 그가 남긴 천재적인 작품들은 여전히 파리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

 

그가 만든 작품 중 하나가 파리의 지하철 입구이다. 여기서도 다시 샤를 가르니에가 등장한다. 가르니에는 그 당시 공공사업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지하철은 완전한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 지하철의 산업적인 성격을 버리지 않는다면 (철도망을 만들기 위한) 어떠한 변명이나 구실도 소용이 없다.” 당시 기차는 증기로 움직였기 때문에 증기를 내뿜기 위해서는 당연히 야외로 달려야 했다. 이것은 파리 도로 미관을 해치는 일이라 도시 안에 철도망을 설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기의 도입으로 인해 지하철은 말그대로 지하로 다닐 수 있었고 1900년 1호선이 처음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이 새로운 시대의 대중교통은 완전히 기능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파리 수도권 철도회사 (La Compagnie du chemin de fer metropolitain de Paris, CMP. 현 파리교통공단 RAPT의 전신 중 하나)는 도시 풍경에 잘 어울리면서 지하철의 새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지하철 입구를 만들고자 했다. “파리의 도로를 너무 거북하게 하지도, 흉하게 하지도 않지만 눈을 즐겁게 만들고 보도를 아름답게 만들어줄” 출입구를 원했다. 이를 위해 건축 공모전까지 열었지만 이 조건을 만족시킬 건축가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엑토르 기마르가 이 주문을 맡게 되었다.

 

기마르는 주철을 선택하였다. 빠르게 변형이 가능한 재료였기 때문에 짧은 주문 기간에 적합하였다. 그리고 기마르는 그의 명성에 걸맞는 완벽한 출입구를 만들어낸다. 단순히 실용성에 미학적 가치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지하철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예술품을 창조한 것이다. 마치 대위법의 대가인 바흐가 여러 독립적인 선율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작곡한 것처럼 돌로 만들어진 파리의 클래식한 파사드와 지하철 입구의 형식, 재료 그리고 색깔은 파리의 도시에 잘 녹아들었다.

 

파리 지하철 2호선 Porte de Dauphine 역의 입구

 

 

이것은 Porte de Dauphine 역의 지하철 입구이다. 나팔같이 활짝 벌어진 유리지붕으로 덮인 이 모델은 “잠자리”라고 불린다.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친 파리에 살아남은 이 모델은 Porte de Dauphine 역과 시청 (Hôtel de Ville) 역의 것 뿐이었다. 파리 시청 역의 입구는 현재 아베스 (Abbesses) 역으로 옮겨졌다. 샤틀레 (Châtelet) 역에 있는 것은 파리 지하철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기마르는 자연에 조언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동, 식물을 탐구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줄기와 잎, 곤충의 발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자연을 자신의 작품으로 옮기는 작업을 한 것이다. 특히 고전 건축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역동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선들을 많이 사용했다. 아르누보의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이 공예적 특성은 이 지하철 입구 건축에서 장점으로 탈바꿈하여 파리의 길을 활기차게 만들고 도시를 하나의 예술품으로서 살아 숨쉬게 해준다.

 

 

참고문헌

 

Georges Poisson, Histoire de l’architecture à Paris, Paris, 1997.

Gilles Plum, Paris Architecture de la Belle Epoque, Parigramme, Paris, 2014.

Mathilde Lavenu, Victorine Mataouchek, Dictionnaire d’architecture, Editions Jean-Paul Gisserot,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