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과 출신에 프랑스어 번역가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는 일본 소설인데, 그중에서도 감히 일본 추리 소설 마니아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일본 소설에 눈을 뜨게 된 책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독소 소설>이고 이미 홈즈, 뤼팡 해적판에 대한 향수가 있었고 심지어 뤼팡은 내가 불문과를 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일본 추리 소설 마니아의 길로 진입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르겠다. 조금 더 TMI를 하자면, 나는 모임, 친목, 그룹, 이런 걸 싫어해서 대학교 새내기라면 당연히 가입하는 동아리를 들지 않은 아싸였는데 4학년 때 처음으로 가입한 동아리가 일본 추리 소설 동아리였다... 원래 일문과를 가려고 했어서 만약 우리 학교에 일문과가 있었다면 나는 지금 일본어 번역가가 되어 있을 수도?
그래서 일본 추리 소설 마니아에게 프랑스 생활 중 가장 힘든 일을 꼽아보라면 단연코 일본 추리 소설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프랑스 공공 도서관에 일본 문학(추리 소설 포함)이 꽤 많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프랑스어로 된 일본 책을 볼 필요가 없었으니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그동안 쌓인 (추리) 소설을 탐독하고서 그 짧은 시간에 도서왕이 되기도 했었다. 교보문고 전자도서관을 알게 된 이후로는 (비록 책이 다양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책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아니, 엄청나게 해소할 수 있었다.
오히려 책을 쉽게 빌려 볼 수 있는 지금의 환경에서는 바쁘다는 핑계로(사실 진짜 바쁘다...) 잘 못 읽고 있었는데, 오늘은 꼭 읽어보고 싶었던지라 바쁘든지 말든지 일단 날 잡고 한 권을 읽어보았다.
제목은 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
세계 추리 소설을 대표하는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경감, 그리고 에도가와 란포의 아케치 코고로. (참고로 명탐정 코난의 에도가와 코난의 이름은 이 에도가와 란포에서, 모리 코고로는 아케치 코고로에서 따왔다. 코난은 당연히 홈즈의 코난 도일. 혹시 란은 란포의 란?) 이 4명의 명탐정이 일본에 모여 일본 최대의 미스터리라고 불리던 '3억 엔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다. 반전의 반전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추리 소설의 매력!
여기서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경감은 파리 경찰국의 형사이다. 소설의 배경은 일본이지만 파리에 관한 내용이 등장을 하는데 그중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정보(?)가 바로 메그레 경감이 리샤르 르누아르 가의 공동 주택에 살고 있단 것이었다. 리샤르 르누아르... Richard Lenoir..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지?
처음에는 오페라, 갤러리 라파예트 근처 2구인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11구에 있었다. Richelieu Drouot랑 헷갈린 듯.. 사실 11구는 자주 가지는 않았던 곳이다. 친구가 11구 살고 있을 때는 가끔 놀러 갔었는데 친구도 이사 간 데다 심지어 그 동네는 파리 테러가 난 곳이어서 그런지 더 갈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맛있는 훠궈 집을 찾고 난 뒤에는 다시 가기도 했지만...
갑자기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기대하지도 않은 곳에서 맞닥뜨린 파리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의 작가와의 대담에서 작가가 이런 말을 한 게 기억이 남기 때문이기도 하다.
니시무라(작가) : [...] 예컨대 아야쓰지 군은 메그래 경감이 어디 사는지 아나? [...] 이런저런 작품들을 읽어보니 리샤르 르누아르 가에 있는 맨션에 산다고 적혀 있었어. 그런 설정 하나를 찾기 위해 엄청난 양의 책을 읽어야만 했지. 책을 옆에 쌓아두고 노트에 메모를 하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아, 내가 엄청난 짓을 저질렀구나'하고 솔직히 조금 후회한 적도 있네. 하지만 반면에 그런 걸 찾아냈을 때의 즐거움도 있어서 결국 네 편이나 써버렸지.
<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 니시무라 교타로, 301쪽 발췌
여기서 아야쓰지 군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추리 소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십각관의 살인> 및 관시리즈 작가인 아야쓰지 유키토
문학 작가와는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내가 하는 일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작가의 말을 내 상황에 빗대어 본다면 :
논문 쓸 때나 글을 쓸 때나 사실에 근거해야 하니 엄청난 양의 자료 심지어 외국어로 된 자료를 읽어야 한다. 자료를 눈 앞에 띄워놓고 글을 쓰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후회도 하지만, 결국 무언갈 찾아내고 완성했을 때의 즐거움 때문에 이 짓을 멈출 수가 없다.
p.s.1 자료를 찾다 보니; 저 메그레 경감이 리샤르 르누아르 가에 산다는 건 <마제스틱 호텔의 지하>라는 책에 이미 나와 있었다. 이 책, 내가 그냥 읽은 것도 아니고 직접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한 책이었는데, 어쩜 이렇게 처음 본 것 같을 수가 있지?
p.s.2
엘러리 퀸은 <Y의 비극>으로 입문해서 <X의 비극>, <국명 시리즈> 등을 읽었는데 네 명 중 가장 익숙한 탐정이자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탐정이다. 나는 추리 소설을 좋아하지만 무서운 건 싫어하기 때문에 호러나 괴기 소설은 안 좋아해서 에도가와 란포나 애거서 크리스티 책은 거의 읽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너무 무서웠어서 다른 책을 읽어 볼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조르주 심농은 뤼팡 마니아에게는 성역과도 같은 세계적인 프랑스어권 추리 소설이지만 이상하게 안 땡겨서 거의 안 읽었다. 그래서 <마제스틱 호텔의 지하>를 읽어봤는데도 기억이 안 났던 것일 수도...
p.s. 3 원래 파리 길 이름 얘기하면서 추억에 젖어보려고 했는데 기승전추리!.. 어쩔 수 없는 추리 마니아
'파리 et 일상 La vie parisienne, quotidienn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리랜서 루틴 4 - 만보의 위력(a.k.a 꾸준함) (0) | 2021.10.07 |
---|---|
프리랜서 루틴 3 - Freelancer is not FREE! (0) | 2021.10.01 |
프리랜서 루틴의 중요성 - 달리기 (0) | 2021.09.14 |
9월이 시작되었다 - 9월 학기제 (0) | 2021.09.01 |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 중고서점 지베르 죈느(Gibert Jeune) (0) | 2021.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