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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단상 斷想 2 - 성당은 왜 파괴되어야 했는가, 노트르담 고난의 역사

RAPHA Archives 2021. 7. 26. 03:43

노트르담 화재가 전 세계인들을 충격으로 빠뜨렸지만,

노트르담 건물이 파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프랑스혁명이 있다.

 

 

부끄럽지만 석사 논문의 한 파트 안에서 노트르담 성당 파괴의 역사를 다루었다. 

노트르담 정면(서쪽 파사드)의 왕들의 갤러리(la galerie des Rois)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계를 표현한 28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중세 시대부터 그 조각상들이 프랑스 왕을 상징한다고 잘못 알려진 바람에

프랑스혁명 당시 이 조각상들의 목이 잘려나갔다. 는 내용이다. 

덕분에 노트르담 화재 및 복원과 관련된 취재, 번역, 보고서 등의 일을 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다시 시간을 돌려 노트르담 화재가 일어난 그날.

취재가 끝나고 나는 인터뷰를 번역하고 있었다. 

번역을 하려면 영상을 계속해서 돌려봐야 하는데

영상 속에는 성당 화재를 지켜보며 울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노트르담이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프랑스를 상징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문득 프랑스혁명 동안 겪은 노트르담의 고난의 역사가 떠올랐다. 

프랑스혁명 때 잔인하게 성당을 부수던 것도 프랑스 사람 아니었던가...? ㅎㅎ

물론 그 과오가 있기에 더욱더 보존에 힘을 쓰는 것이겠지만.

 

 

 

 

노트르담 정면에서 보이는 왕들의 갤러리 sourc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aris_-_Cathédrale_Notre-Dame_-_Galerie_des_rois.jpg

 

 

노트르담은 왜 파괴되어야 했을까? 

종교를 박해했던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노트르담 외에도 수많은 교회와 성당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노트르담 드 파리가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가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혁명 기간 동안 사회, 정치, 종교 운동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고고학적 오류(논문의 참고문헌에 있던 표현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표현)는 촉매제 역할을 했을 뿐, 성당은 이미 처형될 운명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파리 코뮌은 브뤼메르 2년(1793년 10월 23일)에 왕들의 갤러리를 파괴하기로 결정했고 철거를 진행하였다. 

'의회는 종교적 편견을 부추기고 왕정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기념물을 모두 없애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며 앞으로 8일 안에 노트르담 정문을 파괴할 것을 결정했다.' 군주제를 향한 민중의 분노는 교회에 대한 분노와 결합되어서, 사람들은 동상을 꺼내 목에 끈을 묶어 참수형을 집행했다. 상징과 의미를 지닌 기념물은 적과 동일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또한 조각상들뿐만 아니라 성당 곳곳이 훼손되었다. 1792년부터 지붕의 첨탑과 종탑이 파괴되었는데 홀로 높이 솟아 다른 지붕을 지배하는 첨탑, 종탑이 프랑스의 3대 이념 중 하나인 평등에 반하는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건물이 파괴된 이후에도 성당은 여전히 고통을 받았다.

혁명 정부의 탈기독교화를 피할 수 없었던 노트르담은 성당의 기능을 상실한 채 노트르담이란 이름 대신 이성의 사원(le temple de la Raison)이란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성의 여신을 기리는 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 후 식량 창고, 대법원 등으로 사용되었고 1802년이 되어서야 다시 가톨릭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훼손된 성당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관의 조각들은 사라지고 스테인드 글라스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제단, 내부의 무덤 등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이성의 여신 축제 Source: gallica.bnf.fr

 

 

 

파괴된 조각상의 잔해는 대부분 자연에서 부식되어 사라졌지만, 1839년, 1845년 등 점차적으로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머리는 1977년 프랑스 대외무역은행(Banque française du commerce extérieure)이 있는 rue de la Chaussé d'Antin에서 재발견되었다. 발견된 머리는 복원되고 또 그 머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 중세 박물관인 Musée national du Moyen Age- Thermes et hôtel de Cluny에 보존되어 있다. 

 

중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왕들의 갤러리 조각상의 머리 source https://www.musee-moyenage.fr/collection/oeuvre/tetes-rois-juda-notre-dame.html

 

 

 

노트르담 드 파리의 작가이자 노트르담 복원의 계기를 마련한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했다.

'(노트르담에 영향을 준 것은) 피할 수 없는 시간의 결과인 피부의 주름과  비트루비우스와 비뇰라 이후 선생들이 행한 그리스, 로마, 이방인식 작업의 결과인 훼손과 복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혁명이다.' 

위고의 말을 다시 해석해보자.

대성당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시간, 고딕 양식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으로 일어난 복원과 훼손이 노트르담 성당의 흔적을 설명해주지만 그 무엇보다도 프랑스혁명이 노트르담 성당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